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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 '교실 붕괴', '청년 실업', '무한 경쟁' 같은 살벌한 낱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글을 쓰는 심정이 스스로도 한심하다. 돌이켜보면 1950년대는 한 마디로 전쟁과 빈곤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작용 탓인지 나에게 그 시대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따뜻하고 투명했던 날들로 미화되어 있다.
공주 같은 시골에서는 과외고 학원이고 도무지 없었고, 고3 한 해 동안만 입시 공부에 집중하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체념한 동급생도 많았지만 그들이 교실의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았고, 대학 입시에 떨어지는 것을 인생의 실패로 여기는 풍조도 아직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물질적 풍요가 증가할수록 나의 세대가 누린 행복의 총량은 점점 더 감소하여, 오늘날 중학생은 최악의 우범 집단으로 묘사되는 비극적 사태에 이르렀다.
거듭되는 얘기지만,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시기에는 누구나 정체불명의 열망과 일종의 광증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때로는 청소년들의 좌절과 일탈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고, 더러는 극단적인 범죄의 양상으로 나타나 개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부정적 외피 자체가 아니라 외피 안에 들어 있는 순수한 영혼들의 상승을 향한 갈망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의 경우 왜 갈망의 에너지는 자아실현의 동력으로 되지 못하고 타자를 향한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파괴력으로 분출되는가.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의 사회적 실체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고민하고 밝혀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인데, 내 생각에 문제는 언제나 그들이 아니라 기존 사회이다.
가령, 최근 대구의 중학생 자살 사건을 계기로 학교 폭력이 새삼 떠들썩하게 거론되고 있지만, 그렇게 떠들어대는 오늘의 주류 언론이 그럴 만한 도덕적 자격을 갖고 있는지 나에겐 의문이다. 그들 자신 어린 중학생에 불과한 가해 학생 몇몇을 감옥에 집어넣고 그들을 닦달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우월자로서의 기존 체제가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약자에게 저지르는 또 하나의 가학 행위, 일종의 마녀 사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가령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의 경우, 이것은 단지 실정법의 위반 여부에 관계된 단순한 형사 사건이 아니라 이 나라 상층 계급의 부패와 타락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실증하는 구조적 사건이다. 이 나라에서 판사나 검사 또는 판·검사였다가 지금 변호사인 분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볼 의무가 있다. 내 생각에 이 사건을 보고서도 자기 직업에 치욕과 절망을 느끼지 않는 법관은 법관으로서 구제불능이다.
그런데 오늘날 '벤츠 여검사 사건'의 당사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 사회의 실권자들이고, 그런 실권자의 일원이 되기 위해 또는 그런 실권자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전쟁을 끝내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실력에 맞게 싸워야 한다.
새해를 맞아 마음에 꼭 드는 문장을 발견했다. 잊지 않게 적어두자.


